게임을 시작하면 즉각 '블랙웰 시리즈'(Blackwell series)를 떠올리게 된다. 게임 소개를 보면 게임 내의 목소리 연기를 지도한 것이 아예 블랙웰 시리즈의 제작자 데이브 길버트다. 이스터 에그도 있다. 게임 내 묘지를 둘러보면 비석 하나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Anne Blackwell / Oct 17 1922 / Jul 26 1981".
나는 블랙웰 언바운드 리뷰에서 이렇게 쓴 바 있다.
"21세기 어드벤처 게임의 참된 진화를 원한다면 우리는 블랙웰 시리즈와 같은 더 많은 추리, 더 많은 탐구, 더 많은 사색을 모색하는 게임들을 응원하고 지원해주어야 한다."
- http://anicca.tistory.com/14
블랙웰 시리즈의 첫 작품 블랙웰 레가시(The Blackwell Legacy)가 출시된 해가 2006년이니, 올해로 10년이 지났다. 나는 늘 블랙웰 시리즈가 다음 세대의 정통 어드벤처 게임이 나아갈 방향을 예시한다고 생각해왔다. 이렇게 대놓고 블랙웰 시리즈를 오마주한 작품이 나오는 것을 보니 드디어 데이브 길버트가 뿌려 놓은 씨앗이 결실을 보기 시작하는 것 같다.
캐시 레인의 게임 플레이는 블랙웰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정보를 중심으로 돌아간다. 단서를 수집하고, 증거를 모으고, 정보를 활용하는 것이 게임 퍼즐의 핵심을 이룬다. 퍼즐을 푸는 행위 자체가 스토리를 이끌어나가기에, 인벤토리(아이템) 퍼즐 중심의 어드벤처 게임보다 답답한 요소가 적고 전개가 빠르다. 데이브 길버트의 회사 우제트 아이 게임즈에서 같은 해(2016) 나온 '샤드라이트'(Shardlight)는 블랙웰 시리즈에서 선보인 퍼즐 요소들을 거의 활용하지 않은데 반해, 이 캐시 레인은 정보 퍼즐을 중심으로 한 게임플레이를 충실히 계승하고 있어 반가웠다.
퍼즐은 전반적으로 쉽다. 캐시가 독백으로 퍼즐의 해답을 거의 다 알려주는 수준이기 때문이다. 퍼즐의 직접적 힌트나 공략을 게임 내에 삽입하는 시스템에 반대하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자동 힌트 시스템은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프리모디아'(Primordia)처럼 자동 힌트를 끄고 킬 수 있게 하면 어떨까? 물론 더 좋은 것은 플레이어가 침착하게 능동적으로 플레이하기만 하면 게임 내에서 필요한 모든 힌트를 얻고 추리할 수 있도록 퍼즐을 설계하는 것이다. 게임 중간 중간 플레이어가 개입할 여지를 조금 더 주었으면 더 훌륭한 퍼즐이 되었을 것 같은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스토리의 분위기는 미드 <트윈 픽스>나 게임 <가브리엘 나이트>와 비슷하다고 보면 된다. 현실을 배경으로 하면서도 초현실적인 요소가 중첩되어 있고 어딘지 오싹한 분위기가 나는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취향에 맞을 것이다. 오직 현실적 사건만 다루는 정통 탐정물은 아니니 그런 분위기를 기대했다면 실망할 수도 있다. 또 하나, 은근히 웃기다. 적재적소에서 터져나오는 캐시의 냉소적이고 살벌한, 때로는 음흉한(?) 유머는 게임의 분위기를 더 생동감있고 현실적으로 만들어주었다.
데이브 길버트는 1인 제작으로 만든 블랙웰 시리즈의 성공으로 어드벤처 전문 회사 '우제트 아이 게임즈'를 차리고 인디 어드벤처 게임 업계의 거인이 되었다. 캐시 레인도 조엘 스타프 하스토(Joel Staaf Hästö)가 세운 1인 제작사 '클리프탑 게임즈'(Clifftop Games)의 작품이다. 1인 제작의 계보를 잇고 있는 것이다. 캐시 레인이 블랙웰 시리즈처럼 좋은 작품을 꾸준히 내놓는 시리즈가 되어 어드벤처 게임 업계의 또 다른 전설이 되기를 기대한다.
평가: 기대 이상
스팀(steam): http://store.steampowered.com/app/370910/
16/07/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