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자하니 강인공지능(Strong AI)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가진 인공지능이라고 한다. 테크노바빌론은 2087년, 이미 그러한 강인공지능이 사회를 감시하고 도시를 규율하는 사회를 배경으로 게임이 펼쳐진다.
이 게임은 밸런스가 절묘하다. 게임 진행의 템포는 지루할 새가 없고, 시나리오는 장르 문법에 충실하게 잘 쓰였으며, 퍼즐은 사이버펑크 세계와 어울리고 합리적이다. 정통 어드벤처 게임은 쉽게 지루해질 수 있는 장르인데, 게임을 하면서 거의 그런 느낌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 게임의 작법도 눈여겨봐야 한다. 어드벤처 게임의 스토리텔링은 소설과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달라야 한다. 어드벤처 게임의 스토리를 소설 식으로 구성하면 퍼즐을 배치할 수가 없다. 소설이라면 말이 안 될 전개지만 게임에서는 허용되는 '게임적 허용'이 도입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너무 작위적이면 아무리 게임적 시나리오임을 감안해도 게임 자체가 후지게 된다. 관건은 결국 퍼즐이 스토리와 얼마나 융합했느냐, 퍼즐이 얼마나 시나리오와 결합해 그 자체가 하나의 스토리텔링이 되느냐다. 어드벤처 게임 시나리오의 훌륭함을 따질 때는 소설이나 영화와는 다른 기준이 필요한 것이다.
만족스럽다. 좋은 SF 영화와 소설이 많은데 왜 굳이 SF 어드벤처 게임을 하는가? 스스로 발견하고 추리하고 탐구하는 맛을 느끼기 위함이다. 테크노바빌론이 명작 SF 단편만큼 매끄러운 시나리오를 보여 주지는 못하지만, 게임 속 세계에 몰입하는 데에는 충분할 만큼의 정합성을 보여준다.
테크노바빌론의 강인공지능 '센트럴'은 컴퓨터 공학뿐 아니라 유전자 공학의 산물이다. 이 센트럴의 개발 비화가 이 게임의 중심 스토리 라인 중 하나다. 개발팀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여러모로 (맥락은 다르지만) 황우석 사태를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하필 핵심 팀원이 한국인으로 설정되어 있고, 그는 게임 최후반부까지 비중이 높은 역할을 맡는다. 얼마 전에 엔딩을 본 '섀도우런 홍콩'(Shadowrun Hong Kong)에서도 한 섀도우러너가 한국인이었는데, 연달아 플레이한 또 다른 사이버펑크 SF 게임에도 한국인이 캐릭터로 나와 흥미로웠다. 원래 사이버펑크는 좀 일본적인 느낌을 사랑하지 않던가? 앞으로는 한국인이 등장하는 정도를 넘어, 한국을 배경으로 한 사이버펑크 작품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게임 중에 진실을 추구하는 지하 저널리스트들의 조직이 언급된다. 이들은 뭔가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처럼 폼만 잡고는 별다른 활약을 하지 않는다. 엔딩에 이들을 지지하는 선택지가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엔딩에 선택지가 두 가지인데, 내 관점에서는 그 나물에 그 밥인 선택지였다. 지하 저항세력을 돕는 선택지가 있었다면 엔딩을 앞둔 선택이 좀더 의미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해석에 따라 돕는 선택이 있었다고 말할 수도 있다.)
은근히 잔인하다. 고어 연출이 많이 쓰인다. 픽셸 아트라 그렇게까지 끔찍한 느낌을 주진 않지만 혹시 고어한 것을 싫어한다면 안 맞을 수도 있겠다.
우제트 아이 게임즈가 배급한 '프리모디아'가 로봇 SF의 명작이라면, 이 '테크노바빌론'은 사이버펑크 SF의 명작이다. 어드벤처와 SF 장르의 팬들에게 권할 수 있는 작품이다. 우제트 아이 게임즈는 유독 SF 장르를 좋아하는 것 같다. 어드벤처 팬이자 SF 팬인 나로서는 최고라고 치켜세울 수밖에 없는 배급·제작사이다.
평가: 탁월함
스팀:
16/08/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