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리뷰. https://youtu.be/HDke7JzUlYI)
나는 플레인스케이프 토먼트(Planescape: Torment)를 십여년 전에 플레이하여 엔딩까지 본 적이 있다. 당시에도 명작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지 않았다. 내용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깊은 감동이나 재미를 느꼈다는 느낌조차 없다. 오히려 비슷한 시기에 즐겼던 아이스윈드데일에서는 떠올려지는게 많은데.
처음 하는 거나 마찬가지인 상태였으나, 플레이를 앞두고 나는 약간의 편견을 갖고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대단하다는 스토리를 확인해보자, 게임 플레이는 별 것 없을테니까.
착각이었다. 스토리도 대단했지만, 그 스토리를 풀어내는 게임 플레이 역시 만만치 않았다. 모두가 알듯이 이 게임의 중심 질문은 "무엇이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가?"이다. 아니 게임이 이런 심오한 질문을? 그러나 철학적인 질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질문을 게임 속에 풀어내는 방식이다. 이 질문은 그저 있어보이려고 게임 속에 툭 던져져 굽신거리는 것이 아니라, 게임의 캐릭터, 스토리, 동료, 퀘스트, 분위기 모두를 복종시키는 방식으로 등장해 게임의 모든 요소를 지배한다.
게임을 시작하자마라 심상치 않은 느낌을 받는다. 우리가 아는 숱한 RPG들과는 전혀 다르다는 걸 바로 눈치챌 수 있다. 시체안치소. 온 몸이 상처 투성이인 자신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자.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나를 대장이라 부르며 괜찮냐고 물어보는 웬 떠다니는 해골. 그리고 등 뒤 피부에 적혀있는 알 수 없는 지시 사항. 나는 누구이고, 이곳은 또 어디인가?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자로 시작해 유령과 그림자와 악마와 신이 공존해 살아가는 듣도 보도 못한 알 수 없는 세계를 모험해야 한다. 그러려면 내가 누구인지를 일단 알아야 하겠는데, 그러자니 또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 세계에 대한 이해가 넓어지자 다시 나를 알게 된다. 자신을 이해하는 여정이 곧 세계(다원우주)를 이해하는 여정이 되고, 그것이 또 나를 알게 한다.
이 게임의 놀라운 점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 있는가?′라는 화두로 메인 퀘스트, 사이드 퀘스트, 동료, 당파, 심지어 다원우주까지 주조되어 있다. 불교 화엄 철학에 의하면, 이 우주는 사방이 거울로 둘러쌓인 방 안에 촛불을 켜둔 모습과 비슷하다고 한다. 촛불은 중앙에 하나이나 그 모습은 각 거울을 통해 무한히 반사된다. 이 게임에서 만나는 캐릭터들, 또 그 캐릭터의 사연들, 이름없는 자의 흔적들, 각 당파의 철학들, 동료들의 배경 스토리들, 우주의 진실들은 모두 "나는 누구인가?"라는 하나의 질문이 서로 반사되며 변주된 모습이다. 이름 없는 자는 도처에서 ′나′를 본다.
게임 속 당파의 갈라짐은 결국 이 무한히 복잡하고 무한히 얽혀있어 불가해한 다원우주를 서로 다르게 이해하면서 나온 것이다. 이 중 어느 하나의 당파에 가입할 수도 있지만 가입하지 않아도 좋다. 어쩌면 무당파가 이름 없는 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태도일지도 모른다. 죽음 이후에나 참된 삶이 있다며 진정한 죽음을 꿈꾸는 당파든, 세속의 삶은 신을 찬미하고 신의 영광을 예비하기 위한 무대라고 생각하는 당파든, 눈에 보이는 감각이 전부며 최대한의 경험을 통해서만 다원우주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당파든, 이름 없는 자는 그 모든 교리에 허점이 있음을 안다. 무수히 죽어보고, 무수히 살아보고, 불멸자가 되어보기도 했으나, 여전히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너 자신을 알라′를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으로 여기고, 선승들은 ′이 뭐꼬?′를 화두로 용맹정진하는 걸까? 이름 없는 자 역시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내면의 길을 택할 수 있다. 나를 아는 것이 곧 우주를 아는 것이다. 정신을 모으고 내면을 들여다보자 분열된 자아는 하나가 된다. 의문은 사라진다. 은산철벽을 무너뜨리고 보니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그렇다면 이제 숭산선사가 말했듯 ′오직 할 뿐′이다. 다시 전쟁 속으로, 삶의 아비규환 속으로 담담히 뛰어든다. ′새로운 관점′으로.
이 모든 내용이 그저 소설처럼 제시되는가? 아니다. 이 게임에는 우연한 마주침의 즐거움이 가득하다. 전혀 쓸모없어 보였던 아이템이 생각지도 못한 새로운 길을 제시하거나 문제 해결의 단서가 된다. 별 생각없이 지켜보고 있었던 캐릭터의 행동 동선이 퀘스트 해결의 열쇠가 되기도 한다. 깜빡 잊고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치즈가 어느 퀘스트에서 쓸모가 있음을 알고 깜짝 놀란다. 동떨어진 장소에 있는 서로 전혀 무관한 줄 았았던 캐릭터들이 알고보니 깊은 사연으로 맺어진 것을 알게 된다. 퀘스트에는 여러 가지의 해결 방법이 있으나 또 다른 해결 방법이 있다는 걸 눈치 채지도 못한 채 실패할 수도 있고, 아니면 우연히 다른 방법을 발견하고 좋아할 수도 있다. 오늘날의 많은 롤플레잉 게임에서 사라진 이러한 종류의 즐거움, 이 발견의 즐거움, 마주침의 즐거움을 느껴보려면 공략을 보지 말아야 한다.
이제 약속된 엔딩으로 향한다. 그러나 그곳에 이르는 과정과 경험은 서로 천차만별이다. 최후의 장소까지도 누구는 남들 다 들고 가는 매우 중요한 퀘스트 아이템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도 있고, 남들 다 가지고 있는 어떤 최후 퀘스트에 필요한 칼이 없을 수도 있다(그리고 없어도 된다). 남들은 아는 무언가를 전혀 모르고 혹은 그런게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을 수도 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은 놓쳤으나 자신은 놓치지 않은 뭔가를 알고 엔딩에 임할 수도 있다. 어떤 능력치 위주로 어떤 방식으로 플레이했느냐에 따라 최종 과제도 서로 다르게 대처하게 된다. 그간 어떻게 플레이해왔느냐와 무관하게 모두에게 똑같이 제시되는 질문 중 하나를 고르는 식의 엔딩이 아니라, 거기까지 오는데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 무엇을 알아냈느냐, 무엇을 이해했느냐에 따라 엔딩 해결 방법이 달라지는 것이다. 플레이어는 게임이 제공하는 수많은 것들을 놓치고도, 심지어 자신이 무엇을 놓친지도 모른 채 엔딩을 볼 수도 있다. 게이머가 많은 것을 원하면 많은 것을 주고, 적은 것을 원하면 적은 것을 주는 게임인 것이다.
동료들은 개성있을 뿐 아니라 하나같이 주인공과 깊은 사연을 공유하고 있어 애틋하다. 헤어지기 쓸쓸하고 꼭 다시 만나고 싶을 만큼.
전투는 명성(?)대로 이 게임의 가장 약한 부분이다. 역설적으로 전투가 별로 의미가 없다보니 인피니티 엔진의 위력(?)도 더 잘 발휘된다. 크게 성가심 없이 게임 진행에 거슬리지 않는 선에서, 게임의 분위기를 유지해주는 선에서 전투를 해치우며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괜히 전투를 의미있게 만든답시고 이 부분에 힘을 주었다면 이도 저도 아니게 더 어설펐을 것 같다.
나는 과거의 내가 왜 이 게임에 깊은 인상을 못받았는지 알 것 같다. 지금보다 어렸던 탓도 있겠지만, 그건 당시의 내가 해치우듯이 게임을 해서가 아닐까. 야마무라 오사무는 『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의 한 구절을 소개한다.
"무사태평으로 보이는 사람들도 마음속 깊은 곳을 두드려보면 어딘가 슬픈 소리가 난다."
저자는 감동하여 생각한다. '이렇게 고요한 야음의 광경이, 이렇게 적막한 말이 이 소설에 있었던가.' 저자는 이 문장을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세 번째 읽었을 때에야 발견했다. 왜 그전에는 이 문장이 저자의 인상에 남지 않았던 것일까? 답은 '빨리' 읽어서이다.*
이 게임도 그렇다.
천천히, 그리고 느리게,
이름 없는 자의 마음 속을 두드려보아야 한다.
평가: 탁월함
17/04/02
* 모험러의 책방, ′천천히 읽기를 권함′에서 자기 인용, http://anatta.tistory.com/4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