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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블랙웰 에피퍼니(The Blackwell Epiphany) 리뷰


블랙웰 시리즈의 5번째 작품이자 마지막 작품이다. 2006년, 2시간 플레이 분량의 소박한 어드벤처 게임으로 시작한 이 시리즈는 2014년 그 창대한 끝을 맺게 되었다. 그 사이 이 시리즈의 제작자 데이브 길버트는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자신의 게임회사 Wadjet Eye Games를 차렸고, 우제트 아이 게임즈는 양질의 어드벤처 게임을 제작·배급하는 견실한 인디 게임회사로 성장했다. (재밌게도 데이브 길버트는 한국에서 영어 강사 일을 한 적도 있다.)


게임 플레이의 중심은 전편 블랙웰 디셉션(The Blackwell Deception)과 마찬가지로 스마트폰이다. 스마트폰이 한 해가 다르게 발전해왔듯이, 게임의 스마트폰 활용도 더 발전했다. 게임 속에서 플레이어는 이제 스마트폰으로 이메일 확인, 자료 검색, 메모, 파일과 사진 저장은 물론이고 모바일 게임까지 다운 받고 접속해야 한다. 그동안 블랙웰 시리즈가 선보였던 정보 검색·조합 퍼즐의 종합 완성판인 것이다. 


퍼즐도 양적으로 더 다채로워졌다. 그 질도 전 시리즈들이 그랬듯 흠잡을 곳이 별로 없다. 블랙웰 시리즈의 퍼즐들은 언제나 플레이어에게 공정하다. 그 퍼즐을 푸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와 힌트를 충실히 제공한다. 필요한 것은 세심한 관찰과 탐문, 추리력 뿐이다. 과거 극악한 난이도를 자랑하던 고전 어드벤처 게임들처럼 공략을 보고나서 '이걸 어떻게 알아내!'라는 생각이 절로 들던 그런 불공정하고 불합리하고 황당한 퍼즐들은 일절 나오지 않는다. 문이 잠겨 있으면 열쇠가 필요하다. 필요한 것은 열쇠가 숨겨져 있는 곳에 대한 힌트와 그 힌트를 통해 단서를 발견하는 관찰력과 사고력이 전부다. 문을 여는데 지나가는 고양이가 필요하고, 또 그 고양이를 얻는데 어디서 풍선을 이상한 사탕과 조합해야 하는 식의 괴이한 공상력은 필요치 않다. 문에는 열쇠, 그 뿐이다. 그러니 막혀도 당황할 필요 없다. 문에는 열쇠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그 곳에 답이 있다. 플레이어는 질문과 탐문, 관찰로 필요한 모든 단서와 정보들을 알 수 있고, 이 점들을 연결해 선을 만드는 작업에서 지적 즐거움을 얻는다. 능동적인 추리의 감각을 맛본다. 


사건을 풀어나가고 스토리를 전개하는 방식은 전편들과 유사하다. 그러나 더 다급해졌다. 이제는 유령도 안전하지 않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유령들의 영혼이 손을 써보기도 전에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한다. 로사와 조이의 임무는 더 막중해지고 어려워지고 위험해졌다. 


게임은 사건을 조사하고 추적하는 과정에서 시리즈 내내 감추어 왔던 비밀들을 모두 플레이어에게 드러내 보여준다. 조이는 왜 유령이 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왜 유령 가이드 역할을 맡게 된 것일까? 그전에 영매와 유령 가이드는 대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런데 영매 역할을 맡았던 로사의 할머니와 고모는 왜 미쳐갔던 것일까? 미치는 것은 로사도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일까? 전편에서 암시된 영매의 존재를 알고 이용하려던 세력의 정체는 무엇인가?


큰 줄기의 메인 스토리뿐 아니라 개별 사건의 서브 스토리도 훌륭하다.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고 억압한 방송 앵커 유령 이야기와 동생이 아버지에게 당한 학대를 모르고 동생을 돌보지 못한 오빠 유령의 이야기는 그 자체로 완결성을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퍼즐과 효과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퍼즐을 통해 이야기가 점차 드러나고 다시 그 이야기가 다음 퍼즐에 힌트를 제공한다. 괜히 『에단 카터의 실종(The Vanishing of Ethan Carter)』의 제작자가 이 게임의 제작자 데이브 길버트를 훌륭한 어드벤처 게임을 만들 수 있는 진정한 재능을 지닌 세계적으로 극소수의 사람 중 하나라고 평한 것이 아니다. 심지어 그는 블랙웰 시리즈를 루카스 아츠의 어드벤처 게임 황금기 이후 유일하게 위대한 어드벤처 게임이라고 극찬했다.


엔딩도 만족스럽고 긴 여운을 준다. 그러나 엔딩에 대해서는 더 말할 수 없다. 


블랙웰 시리즈, 그리고 마지막 작품 블랙웰 에피퍼니는 포인트앤클릭 어드벤처 게임이 21세기에 어떻게 깊이를 더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명작이다. 더 발전하고자 하는 미래의 정통 어드벤처 게임들은 블랙웰 시리즈에서 배워야 할 것이고 배울 수 밖에 없을 것이다. 1편 블랙웰 레가시 리뷰에서 말했듯 굳이 어느 게임에 '어드벤처 게임의 부활'이라는 칭호를 붙여야 한다면 나는 그 영광은 이 블랙웰 시리즈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시리즈가 미래 어드벤처 게임들의 이정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완벽한 마무리다. 이 마지막 5편의 플롯을 모두 이해하고 감동을 느끼려면 1편부터 시작하여 5편에 도달해야 한다. 


게임 길이: 8-10시간

평가: 탁월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