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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스테이시스(Stasis) 리뷰


적막한 우주, 유령선이 되어 버린듯 황폐한 우주선, 승무원들이 남긴 마지막 절규들을 통해 밝혀지는 사건의 진실. 끊임없이 변주되는 플롯이지만 그만큼 재미없기가 힘든 최소한 기본은 보장하는 플롯이다. 무협지의 플롯이 수백 수천 번 씩 반복되도 다른 배경과 다른 캐릭터로 등장하면 여전히 재미를 주듯이, SF 호러의 기본 공식 역시 새롭게 연출되면 또 새로운 재미를 준다. 게다가 스테이시스는 어드벤처 장르로 만들어졌으니 직접 사건을 추적하는 재미가 거기에 더해진다. 뻔한 얘기도 내가 주체가 되어 탐구하게 되면 뻔한 얘기가 의미심장한 이야기로 탈바꿈한다. 그렇다고 기본 만듦새가 너무 후지면 안 되는데, 기본적인 배경 설정과 스토리 라인 역시 괜찮다. 설정은 파고들만한 여지도 제법 있고, 스토리는 다음 사건 전개에 대한 궁금증을 일으킬 만한 정도는 된다. 


그런데 죽은 승무원들이 남긴 PDA를 읽으며 한껏 고조된 긴장감과 몰입감이 캐릭터들이 등장만 하면 깨질 때가 많았다. 첫째, 대사의 수준이 PDA에 적힌 일지의 수준보다 떨어진다. 다른 작가가 썼나? 둘째, 상황에 어울리지 않거나 억지스런 전개는 꼭 캐릭터 등장 신에 존재한다. 셋째, 게임의 전반적인 훌륭한 아트워크에 비해 캐릭터 초상화의 품질이 이질적일 정도로 떨어진다. 넷째, 화룡정점은 목소리 연기다. 산통을 깬다. 차라리 '더 라스트 도어'(The Last Door)처럼 목소리 연기가 없는 게 더 나았을 것 같다. 주인공 역은 그래도 연기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역시 대사의 문제였던 것일까? 재밌는 사실은 이 게임이 새너타리움(Sanitarium)의 영향을 받았다고 많이 언급되는데, 새너타리움 역시 형편없는 목소리 연기로 유명했다는 것이다. 


게임의 중심 테마도 엇박자다. 이 게임은 다음의 문구를 보여주며 시작한다.


"가족 없이 세상에 홀로 남겨진 인간은 차가운 세상 속에서 떨 수밖에 없다."


이 문구는 처음 한 번 등장하고 마는 게 아니라 게임 속에서 주인공도 반복하고, 악당도 반복한다. 그러나 이 메시지가 그렇게 반복해 강조되어야 할 만큼 이 게임에 어울리는 중요한 메시지인가? 나는 오히려 생뚱맞다는 느낌만 받을 뿐이었다. 19세기 빅토리아 영국을 배경으로 한 다른 분위기의 호러 게임인 '더 라스트 도어'(The Last Door)의 중심 메시지는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을 보라'였다. 이 역시 게임에서 수없이 반복되는데, 이 메시지는 게임의 분위기와 주제 의식과 잘 맞았기에 거부감이 없었다. 얼마 전에 방한한 슬라보예 지젝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공지능·기후변화와 더불어 유전자공학과 지적재산권 문제를 과소평가하면 안 된다. 특히 유전자공학과 인공지능의 결합이 우려된다. 미국·유럽의 군부는 뇌 활동에 개입하고 감정을 통제하는 데 필요한 연구를 하고 있다. 핵만 있으면 된다는 북한은 멍청한 것이다. 이런 도전 때문에 국가보다 더 강한 조직과 권력 메커니즘이 필요하다. 한계를 드러낸 시장과 자본주의에 생존을 맡길 수 없다.”(중앙일보, 2016-07-07, 「문명전환강좌 '세계 지성에게 묻는다' ① 슬라보예 지젝」 중)


컴퓨터의 인공지능도 흥미롭지만, 생명체에 인위적으로 덧씌어진 인공지능도 흥미롭다. 지젝이 지적한 문제를 게임은 이미 흥미로운 소재로 잘 활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부분을 더 중심 테마로 부각했으면 어땠을까?


엔딩, 하.. 엔딩 부분의 스토리 라인도 한 마디 안 할 수 없지만 스포일러가 되므로 삼가겠다. 정직하게 스토리를 끌고 가다가 그냥 담담하고 정직하게 끝내도 충분히 좋은 스토리, 감명을 주는 스토리가 될 수 있다는 것만 언급하고 싶다.


퍼즐은 좋은 부분도 있지만, 정통적인 포인트앤클릭 어드벤처 게임의 단점을 답습하는 부분도 많다. 이런 엄격한 세계를 배경으로 한 어드벤처 게임은 세계관의 제약 때문에 기발한 퍼즐을 구상하기 더 까다롭다. 여러 해법이 시도되었지만 내가 가장 선호하는 방향은 '우제트 아이 게임즈'(Wadjet Eye Games)에서 나오는 어드벤처 게임들이 채택하고 있는, 게임 속 단서와 정보를 직접 타이핑하여 검색하고 조합할 수 있는 자율권을 플레이어에게 주는 방식이다(한마디로 텍스트 어드벤처의 요소를 도입하는 방향). 이 방향은 퍼즐이 어렵지 않아 고전 어드벤처 게임들처럼 공략집이 필수가 아니면서도 플레이어에게 추리를 한다는 감각과 게임 스토리 진행을 주도한다는 감각을 준다. 제일 선호하지 않는 방식은 대책없이 퍼즐의 난이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쁜 방식은 픽셀헌팅과 불충분한 설명과 힌트로 난이도를 높이는 것이다. 난이도가 높다고 좋은 퍼즐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 하필 이 '스테이시스'에서 내가 진행하다 막힌 곳은 거의 픽셀헌팅 부분이었다. 어휴, 옛날 도트 게임보다 더 찾기 어려웠던 것 같다. 또한 아이템과 주위 환경의 상호작용, 캐릭터와 주위 환경의 상호작용 부분도 뭔가 애매한 부분이 많아 중간 중간 까다로웠다. 게다가 주운 아이템에는 아이템 이름 외에는 설명도 제공되지 않는다. 거기에 인벤토리 단축키도 없어 막힐 때 아무 거나 일단 시도해보기도 영 불편했다. 일부러 그런 짓(try-everything-on-everything) 하지 말라고 불편하게 만들었나? 나만 단축키를 모르고 있던 것인가?


여러 단점을 늘어놓아 내가 이 게임을 아주 끔찍한 기분으로 플레이한 것 처럼 보일 것 같다. 그렇지는 않다. 재밌게 했고, 인상깊은 장면과 연출도 있었다. 굉장한 명작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수 있는 게임이지만, 호러 장르의 팬, 어드벤처 장르의 팬에게는 충분히 기본 이상의 만족감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평가: 괜찮음


스팀(steam): http://store.steampowered.com/app/380150/

gog.com: https://www.gog.com/game/sta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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